19권 8책과 19권6책의 목판본 2종이 있으며, 간행 연대는 미상이다. 책머리에 박세당(朴世堂)의서문이 있고 발문은 없다.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권1∼6에 시, 권7∼14에 소차(疏箚), 권15∼17에 계사(啓辭)와잡저, 권18·19에 행장과 비지(碑誌)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대부분 자연에 대한 찬미와 교우들과의 우의를 읊은 것이 많다. 소와 차는 대부분 대동법(大同法)·호패법(號牌法) 등 제도의 시행과 병자호란 당시의 국난에 대한 대처 방안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건의 사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소와 차에 중요한 내용이 많다.
이조판서로 재직할 때 올린 「천삼신소(薦三臣疏)」에서는김진국(金盡國)·김시양(金時讓)·장유(張維) 등 3인을 천거하면서, 인재가 부족해 국가의 위태로움을 극복하지 못하였음을지적하고, 인재의 등용에 힘써 국난에 대비할 것을 진언하였다. 그리고위급할 때에는 상중에는 벼슬하지 않는다는 관행에도 반드시 구애받을 필요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논속환차(論贖還箚)」에서는 당시 호란의 와중에청나라에 끌려간 포로들의 송환 문제를 언급하면서, 속환 비용을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100냥 이내로 제한하고, 속환 비용의 상승으로 인해 가난한 이들이돌아오지 못하는 일을 방지할 것을 진언하였다. 이는 애민정신과 실용주의적인 경세가로서의 그의 면모를보여 주고 있다.
병자호란의 위기를 맞아 올린 「병자봉사(丙子封事)」에서는이민족의 침입에 의한 국가의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에 대해 외환을 내치(內治)로 대비할 것을 진언하였다. 즉, 청군이의리를 저버리고 침입하였으나 혈기를 앞세워 대항하는 일이 급한 것이 아니라, 인재를 발탁해 쓰고 정치를개혁하여 국세를 굳게 다지는 것이 어려움을 이기는 길이라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병자봉사」에서는 주화론(主和論)을 전개하며청나라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는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사직과 백성을 보호하고 뒷날을 도모하기 위해 적과 화친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척화로 나라가 짓밟히고 죄 없는 백성이 죽어 가는 것보다는 주화로 그들을 달래어 사직을 보존하며 민생을 살리고, 나아가 평안도에 본부를 설치해 항상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임전무퇴의 정신을 진작시켜 뒷날에 대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것이다.
이에 부연하여 세 번째 「병자봉사」에서도 주화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사직의 존망과 신하로서의 절의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정치사상과 주화파·척화파의 논쟁 및 병자·정묘 양대 호란 당시의 국내외 상황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호란 당시의 국제 정세와 조선 정부의 대처 방식을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이며, 나아가 인조 시대 정치사연구에 대해서도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최명길(崔鳴吉)
조선시대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국내 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사신 일행과의 접촉 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 간 복상(服喪)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 뒤 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 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때문에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또 계운궁 신주(神主)의흥경원(興慶園)주 01)합부(合祔)주 02)에 따른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다시우참찬·부제학·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에 양관(兩館)주 03)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절화(絶和)주 04)의 의논이 높아졌는데 그는 당장은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여 몇 년간은 무사할 수 있으나 종막(終幕)은 심히 우려된다고 하면서원망을 불러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지적하였다. 1635년 초 이조판서직을 면하고 몇 달 뒤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밖에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채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강도(江都)와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여 강력히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 해 겨울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12월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기울어져 다음 해 정월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진행 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조선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며 “조정에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시국에 대한 각기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쏟았다. 이에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 가을에 좌의정이되고 다음 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그 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주 05)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했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임경업(林慶業) 등이명나라와의 내통하고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당하였다. 이후 1645년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陽明學)을독수(獨修)주 06)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우장유나, 계자(系子) 후량(後亮) 및 손자 석정(錫鼎) 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 2책 등이 있다. 시호는문충(文忠)이다.